개인적 기억

유진은 나이 터울이 제법 지는 두 남자 형제 밑의 막내딸로 태어났다.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터를 잡은 곳은 1960년대가 되어서야 간신히 서울로 편입된, 높은 빌딩보다는 자그마한 논밭으로 가득한 서울 변두리의 한 동네였다. 변변찮은 음식점도, 영화관도 없고, 학생들이 맘 먹고 일탈을 하려고 해봤자 갈 곳이 없어 강제로 건전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...

2023.08.25의 일기

며칠 전 1988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<아키라>를 봤다. <아키라>는 가까운 미래, 핵폭발을 연상시키는 정체 불명의 폭발로 인해 세계가 멸망하고, 그 위에 다시 세워진 도시인 네오-도쿄를 배경으로 한다. 네오-도쿄는 폭력, 마약, 반정부 시위와 탄압, 군사 쿠데타, 세기말에 대한 공포로 가득찬 혼란한 도시로, 그곳에서 폭주족으로 살아가...

2019.12.20일의 관극 기록

<로테르담>은 서사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극중 인물들의 대화와 비언어적 연기를 통해 서로의 민감한 감정과 욕망, 정체성이 얽히고 꼬이는 지점들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극이다. 게다가 웃기다. 정말로 웃기다. 동시대 퀴어, 페미니스트 친구들이라면 몇 번이나 못 참고 터져버릴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. 평생 디나이얼 레즈비언으로 살아오다 애...

영화 <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>

내게는 남들이 다 좋다고 난리치는 영화를 한참 보지 않고 묵혀두다가, 모든 호들갑이 다 가라앉았을 때에야 느지막하게 찾아보는 고약한 취미가 있다. <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> 역시 마찬가지로, 작년에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와 양자경을 찬양하며 난리법석을 피울 땐 별 관심 없다가, 유행이 한 다섯 번쯤은 지나가서 “아직도 이 영화를 ...

허주영 시집, <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>

‘버릴 것인지? 말 것인지?’ 질문의 마지막 끝에서 생존한 물건은 접이식 식탁과 스툴이었다. 15평 남짓의 빌라에서 식사라는 단 한 가지 용도를 위해 식탁을 마련할 만한 자리는 없었다. 좁은 집의 가구라면 1인분 이상의 몫을 해야 하고, 특히 식탁과 같은 커다란 가구는 물리적으로 생활 전반을 책임질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. ... 나의 집은 이...

골드키위새, <순정 히포크라테스>(카카오웹툰, 2019.06~2023.04)

순정? 순정만화? <순정 히포크라테스>! 요즘 ‘순정만화’라는 단어는 예전만큼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. ‘순정만화’, 혹은 ‘소녀만화’로 불리던 만화들은 어느새 ‘로맨스’, ‘로맨스판타지’, ‘캠퍼스로맨스’, ‘##물’ 등의 보다 세분화된 장르명으로 불리게 되었고, ‘순정만화’는 낡고 바랜 만화 잡지에서나 보던, 기괴할 정도로 크고 별빛이 총총 박...